교육혁명
1. 의무 교육제
우리나라 일제강점기의 문맹률은 80%였고 중학교 이상 졸업자 25,000명으로 상위 1%에 해당했다. 법학박사가 1명도 없었다고 한다.
2. 선 헌법 제정
이승만 대통령은 개혁에 앞서 항상 법 제정부터 하고 움직였다. 이는 민주적 절차를 거쳐서 만들어진 법 조항 없이 토지 강탈과 숙청을 되풀이한 북한과 대조를 이룬다.
*건국 헌법 16조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적어도 초등 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
이는 중학교 고등학교 등으로 의무 교육을 확대해 나간다는 의지이다.
*이승만 집권 후반기 취학률 변화
초등생 96% 취학
중학생 10배 증가
고등학생 3.1배 증가
대학생 12배 증가. 영국보다 많을 정도였다.
여자 대학생은 17배 증가했다.
3. 전시교육
이승만은 6.25 임시수도 부산에 ‘전시학교’를 운영하도록 지시했으며, 피난 내려온 대학생들을 ‘전시 연합 대학’에 등록시켜서 교육이 중단되지 않도록 했고 군대에 입대시키지 않았다. 특별 조치에 원성이 높았고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전쟁이 끝나고 나라 발전을 위해서 인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여 굽히지 않았다. 이 대학생들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한 세대 전체가 빠져 기형적인 인구구조를 낳았을 것이고 전후 복구 사업에 투입할 젊은 인력을 구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농업국이었던 나라를 공업국으로 전환해야 비약적 성장이 가능하다는 판단으로 1952년 12월 ‘인하 공과 대학’ 설립도 지시했다. (하와이 교민들이 한인 기독학원 부지를 판매한 자금의 일부를 이승만에게 보냈다.)
4. 성인들을 위한 문맹 퇴치 운동
‘작대기 투표를 일소하자’ (집권 초반 문맹률이 높아 선거철에는 선거 입후보자의 사진에 작대기를 붙여서 구분했다.)
집권 후반기 성인 문맹률은 80%에서 20%로 떨어졌다.
5. 유학과 인재 양성
조선말기에서 1945년까지 미국 유학생은 500명 미만이었다.
이승만 집권기에 유학, 훈련, 연수로 미국에 간 인원은 20,000여 명이었다.
이 중 한 사람은 박정희다.
이승만 시대에 교육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다면 박정희 시대의 경제 발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신현확의 회고)
6. 국민국가의 탄생
-’경계가 확실한 영토 내부에 역사적, 문화적, 인종적 정체성을 공유한 균질적 구성원들을 창출하는 것이 바로 국민국가의 업무이자 근대 이행의 도달점이다.‘
-’이질적 집단과 세력을 단일한 정치 목표와 행위로 통합하는 국가를 국민국가라고 한다면, 국민국가 만들기에서 문자 공동체의 탄생과 확대보다 더 중대한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송호근)
-수동적인 백성을 교육을 통해 ‘애국심’을 지닌 정치적 실체로서의 ‘국민’으로 바꾸어야 한다(중국 개혁파 량치차오)
이승만은 정신적 노예 상태에 있던 백성들을, 주인 의식을 가지고 국가 경영에 참여할 국민으로 성장시켰다.
**이승만의 토지개혁과 교육혁명 -이호 지음(백년동안 출판) 북쉐어